인간 생존을 위한 필수품의 하나가 소금이다. 따라서 어떤 환경에서나 소금을 얻기 위한 노력은 멈추지 않았다. 인류의 역사는 소금을 찾는 역사이기도 했다.
우리나라에서 암염을 채굴했다는 소식은 듣지 못했다. 바닷물을 증발시켜 소금을 얻은 것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다. 이러한 보편성에도 조선시대 이후 1950년대 중반까지 다양한 제염 과정이 나타난 것은 동해, 서해, 남해, 제주 등 해역에 따라 독특한 연안 환경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제염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35퍼밀 정도의 바닷물 농도를 200퍼밀에 이를 만큼 염도를 높이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바닷물을 가마솥에 넣고 끓일 때 많은 연료를 준비해야 한다. 이렇게 짠물을 만드는 방법으로 갯벌이나 모래나 돌(암반)을 이용했다. 이 경우도 염전 위치, 조차, 지형지질 등의 영향을 받는다. 그래서 모래소금, 갯벌소금, 돌소금이라 불리기도 했다.
등장과 퇴장 : 천일염과 자염의 운명
1907년 천일염전이 축조되면서 다양한 제염법은 사라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크기는 차이가 있지만 염전 모양과 생산과정이 비슷한 천일염전이 등장했다. 그것이 오늘날 우리가 대부도, 서산, 영광, 신안 등에서 볼 수 있는 염전이다. 이 천일염전은 제방축조 기술이 발달하고, 노동력을 동원할 수 있는 정치·사회 환경이 조성된 6.25 전쟁 이후 크게 확대됐다.
이에 따라 1950년대 중반에 이르면 자염 생산을 멈췄다. 제주도 구엄리 돌소금이나 종달리 모래소금도 생산이 중단됐다. 다만 너른 암반으로 이루어진 구엄리 소금빌레는 공유수면으로 모습을 확인할 수 있지만 간척으로 농지를 조성한 종달리 소금밭은 위치만 확인할 수 있을 뿐이다.
구엄마을의 돌소금 생산이 중단된 것은 종달의 모래소금과 비슷한 시기다. 전쟁 이후 육지와 제도를 잇는 뱃길이 만들어지면서 물류가 오가고, 천일염전이 축조돼 천일염이 대량 생산돼 제주도로 들어오면서다.
1950년대 중반에 이르면 신안 섬에도 천일염전이 조성되는 시기다. 현존하는 가장 큰 염전 단일염전인 태평염전이나 주민들로 이뤄진 대동염전도 이 시기에 완공되어 천일염을 생산하기 시작했다. 전라북도의 삼양염전이나 충청도 서산과 태안지역 염전들은 이미 천일염을 생산하고 있었다. 1990년대 소금시장의 개방과 정부의 폐전 정책은 반대로 수도권에서 가까운 곳부터 폐전이 진행됐다.
구엄리 돌염전, 소금빌레
구엄리는 제주특별자치도 애월읍에 속한다. 지금은 구엄리, 중엄리, 신엄리로 나뉘어 있지만 18세기 중반까지는 엄쟁이라는 한 마을이었다. 18세기 중반 이후 인구 증가로 신엄과 중엄이 형성되면서 구엄리로 자리를 잡은 것으로 보인다.
구엄리는 ‘옛 엄쟁이’이다. 엄쟁이는 소금을 굽는 사람들을 말한다. 종달리 사람들을 ‘소금바치’라고 부르는 것처럼 구엄리 사람들을 ‘엄쟁이’라 했다. 모두 소금을 굽거나 생산하는 주민들을 낮춰 불렀던 표현이다. 뭍에서 소금을 생산하는 사람도 ‘염한이’라고 불렀다. 인간의 물론 모든 생물의 생존을 위해서 꼭 필요한 소금을 만드는 일을 하지만 냉소적인 시선을 견뎌야 했다.
오늘날 제염은 국가 중요 무형유산으로 지정됐다. 또 천일제염은 국가중요어업유산으로, 천일염전 주변 갯벌은 세계자연유산으로 등재됐다. 그럼에도 소금을 생산하는 염부의 삶은 팍팍하고 염전은 개발 위험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이미 우리나라 천일염전의 절반은 태양광 시설로 바뀌었거나 바뀔 예정이다. 제주도 전통소금이야 더 말할 필요가 있을까. 구엄리를 다녀오고 들었던 생각이다.
지금은 구엄포 상코지 옆에 염전으로 사용하는 500여 평의 평평한 천연암반이 있다. 코지는 바다로 튀어나온 땅이나 바위를 말한다. 육지에서 ‘곶’과 같은 곳이다. 구엄리가 주목을 받은 것은 육지에서 상상할 수도 없는 돌염전 때문이다. 제주도를 화산섬으로 화산암과 퇴적암 등이 발달했다. 구엄리 앞에 돌염전도 파호이호 용암이 흘러 형성된 것이다.
돌소금은 어떻게 생산되었을까
지난해 가을 구엄리 돌소금밭을 찾았다. 그동안 몇 차례 돌소금 밭을 배회했지만 정작 구엄리 주민을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지 못했다. 이번에는 미리 약속하고 마음먹고 이야기를 듣겠다며 나섰다.
돌염전을 안내해 주신 분은 마지막 엄쟁이이자 전승자이신 조두헌(90) 어르신이다. 지난해 말에 만났을 때 한 사람 모자라는 90이라 하셨다. 날씨도 좋았다. 마을 해녀 삼촌들이 돌염전 건너 바다에서 소라를 줍느라 물질이 한참이었다.
돌소금은 물때와 상관없이 만들 수 있다. 바닷물이 들지 않는 암반(빌레) 위에서 소금을 만들기 때문이다. 암반은 거북등처럼 갈라진 넓은 바위다. 갈라진 틈을 수산봉에서 가져온 찰흙으로 두렁이라 부르는 둑을 만든다. 그렇게 예닐곱 개의 두렁막이를 만드는데, 이를 ‘물아찌는돌(호겡이)’이라 한다. 이 중 너덧 개는 간물을 만드는 증발지이고, 두 개는 소금을 만드는 증발지 역할을 한다. 그 옆에 짠물을 보관하는 통인 ‘혹’을 만든다. 이것이 돌염전의 모든 시설이다.
바닷물이 많이 들 때 허벅으로 바닷물을 담아와 호겡이에 부어 햇볕과 바람의 도움을 받고 뜨거워진 바위 열기로 증발시킨다. 그렇게 짠물이 만들어지면 결정지 역할을 하는 ‘소금돌’로 옮겨 소금을 만든다. 소금돌은 호겡이 중에서 평평한 돌이다. 일조량이 부족할 때나 겨울이면 가마솥에 짠물을 옮겨 삶기도 했다.
돌염전의 시작은 제주도에 소금 생산이 시작된 것으로 알려진 조선 말부터 1950년대 중반까지다. 이 중 일제강점기에는 가마에서 끓이는 전오염에서 천일염으로 전환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구엄리 40여 가구가 20평에서 30평 내외 소금밭을 가지고 있었다. 생산된 소금은 자가소비를 제외하고 소길리나 장전리에 판매했다.
돌염전 재생은 불가능한가
구엄리의 돌소금 복원이 시도된 것은 1996년이다. 당시 돌염전을 지켜본 마지막 세대였던 조 씨가 어촌계장을 하던 시절에 어촌계 지원사업을 받아 시작됐다. 그리고 30년이 흘렀다. 그 사이 조 씨는 돌소금을 찾는 사람이 있으면 안내했다. 어촌체험마을로 지정돼 2010년대 중반에는 돌소금만들기 체험 프로그램을 운영하기도 했다. 하지만 여기까지였다. 조 씨는 행정에서 관심을 갖고 문화재로 지정되기를 원했지만 추진되지 않았다.
이제 90대에 들어선 조 씨는 지난해 필자와 만났을 때 ‘마지막 손님’이 될지 모르겠다고 했다. 소금빌레를 오르내리는 것도 버거워했다. 아직 조 씨 뒤를 이어 돌소금밭을 지키며 안내해 줄 사람이 없다. 진석범 어촌계장도 돌염전의 가치와 후계자가 필요하다는 것을 공감하지만 그것으로 생계를 이을 수 없는 현실을 아쉬워했다. 그래서 문화재로라도 지정됐으면 하는 아쉬움이 남아 있다.
조 씨와 돌염전에서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젊은 여행객들이 소셜미디어에 올리기 위한 좋은 사진을 찍느라 다녀갔다. 노을이 지는 바다를 배경으로 염전에 비치 반영이 아름답다. 외국인도 만났다. 소금을 생산했던 염전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제주 여행 안내서에는 돌염전이 잘 소개되어 있지만 정작 주민들 곁에서는 점점 멀어져가고 있다. 돌소금을 채취하는 모습이 젊은이들의 소셜미디어에 회자되면 얼마나 아름다울까.
◆ 김준 섬마실 길라잡이
어촌사회 연구로 학위를 받은 후, 섬이 학교이고 섬사람이 선생님이라는 믿음으로 30여년 동안 섬길을 걷고 있다. 광주전남연구원에서 해양문화 관련 정책연구를 한 후, 지금은 전남대학교에서 학술연구교수로 어촌공동체 연구를 이어가고 있다. 틈틈이 ‘섬살이’를 글과 사진으로 기록하며 ‘섬문화답사기’라는 책을 쓰고 있다. 쓴 책으로는 바다인문학, 바닷마을인문학, 섬문화답사기, 섬살이, 바다맛기행, 물고기가 왜, 김준의 갯벌이야기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