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대에 접어들면서 일본의 버블 경제 시기 나왔던 곡들이 다시금 주목받기 시작했다.
일본인들이야 자신들의 호시절을 회상하는 의미에서 그럴 수도 있겠지만 오히려 이 노래들은 세계로 뻗어 나가면서 뒤늦게 전지구적 관심을 받게 된다.
국내 사정도 예외는 아니었는데 일본 문화가 정식 수입되기 이전인 80년대 한국에서의 경우 정작 현재 ‘시티 팝’으로 분류되는 곡들과는 별개의 일본 음악들(이를 테면 안전지대나 콘도 마사히코 같은 것들)이 주로 인기를 끌었다. 국내에서도 이 열기는 뒤늦게 도착한 셈이다.
시티 팝이라는 명칭 보다는 ‘뉴 뮤직’이라는 명칭이 앞서 존재했다. 시티 팝이라는 단어 자체가 90년대부터 통용되던 말이기는 하지만 이 단어는 장르의 부활과 함께 마치 2000년대의 시각에서 버블경제 황금기를 관조하고 있다는 인상을 줬다.
지금 와서 돌아보면 90년대 무렵 국내에도 미국의 ‘여피(Yuppie)’ 바람 때문인지 뭔가 도회적 분위기의 CF나 영화들(이를테면 안성기와 강수연 주연의 <그대 안의 블루>)같은 것이 많이 나왔다 회고되는 것과 비슷했다.
대체로 시티 팝이라 분류되는 것들은 퓨전 재즈나 미국의 AOR에서 영향 받은 일본의 7, 80년대 음악들을 통칭하는 의미로 정의됐다.
사실 AOR이라는 장르 자체의 경계가 모호하기도 한데, 시티 팝의 경우 보다 일본적인 색깔이 두드러지는 편이었다. 대체로 곡들은 부드럽고 능숙하게 연주된, 그리고 깔끔한 레코딩으로 마무리되어 있는 외형적 특색이 있었다.
다양한 시티 팝 아티스트들이 존재하고 그것의 시작을 어떤 관점에서 보느냐에 따라 분류와 정의가 달라질 수도 있겠지만 대체로 슈가 베이브가 일본 시티 팝의 ‘그라운드 제로’라 칭해진다.
슈가 베이브는 밴드로써 큰 성공을 거두지는 못했지만 일본 팝/록음악의 지형을 영원히 바꿔 놓았고 이후 수많은 아티스트들에게 영향을 미쳤다는 점에서 여전히 그 중요도가 인정됐다.
오히려 시티 팝에 익숙한 사람들이라면 슈가 베이브에 대해 다소 이질감을 느낄 수도 있을지 모른다. 이들의 사운드는 스틸리 댄이나 토토 보다는 캐롤 킹과 핍스 애비뉴 밴드에 더 가까웠기 때문이다.
이들은 60년대 팝에서 많은 것을 가져왔기 때문에 밴드가 등장했던 70년대 기준으로 보면 오히려 시대에 뒤쳐진 것처럼 감지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사실 이들에게 있어 시대성은 크게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슈가 베이브의 야마시타 타츠로는 인터뷰에서 슈가 베이브의 데뷔 앨범이 발매된 40년 전부터 자신이 생각했던 목표는 오래되지 않은 음악, 시대를 비추지 않는 음악을 만드는 것이라 말했던 바 있었다.
슈가 베이브는 시티 팝을 이야기할 때 가장 중요한 인물들인 야마시타 타츠로와 오오누키 타에코, 거기에 무라마츠 쿠니오를 중심으로 활동을 전개해갔다.
알려진 대로 야마시타 타츠로는 이 분야에 있어 전설적 존재가 됐고, 오오누키 타에코 또한 아라이 유미, 요시다 미나코와 함께 ‘뉴 뮤직 3인방’으로 군림했다.
무라마츠 쿠니오의 경우에도 애니메이션 <명탐정 홈즈>와 <란마 1/2>의 주제곡을 작곡하는 등 꾸준히 음악 활동을 이어 나가고 있었다. 이 세 사람만이 그대로였고 1973년부터 1976년까지 여러 연주자들이 교체됐다.
1972년 무렵 대학생이던 야마시타 타츠로는 주로 비치 보이즈의 커버곡으로 구성된 자주 제작 앨범 <Add Some Music to Your Day>를 록 카페에서 알게 된 친구들과 만들었다. 그리고 이제는 자작곡을 만들어 보자는 의미에서 1973년도에 슈가 베이브를 결성했다.
1974년 4월 데모 테이프를 녹음하고 앨범제작이 결정되면서 9월부터 리허설을, 그리고 10월부터 녹음을 시작했다. 미국적이고 보다 선명한 녹음 방식을 채택하려 했는데 당시 일본의 메이저 회사에서는 이런 방식들이 용인되지 않았고 결국 인디에서 음반을 발매했다.
슈가 베이브는 야마시타 타츠로와 오오누키 타에코의 절묘한 밸런스가 매력적이었으며 각각이 별개의 곡을 만드는 남녀 혼성 그룹이기도 했다.
꾸준히 라이브 활동을 했지만 포크나 블루스 록이 인기였던 그 무렵, 일본적인 정서가 가미된 슈가 베이브의 세련되고 상쾌한 팝 사운드는 트렌드와는 차이가 있었고 큰 반향을 불러일으키지는 못했다.
해피 엔드의 오오타키 에이이치의 레이블 나이아가라와 계약하면서 슈가 베이브의 1975년도 데뷔 작 <Songs>는 나이아가라의 첫번째 앨범이 됐다. 하지만 이는 당시 분위기와 너무나도 달랐고 앨범의 판매 또한 부진하면서 단 한 장의 정규 앨범만을 발표한 이후 밴드는 1976년도에 해체한다.
이미 모두가 알다시피 야마시타 타츠로는 후에 솔로 아티스트로 큰 성공을 거두고 오오누키 타에코 또한 동료였던 야마시타 타츠로와 사카모토 류이치의 도움으로 성공적인 솔로 데뷔를 하게 된다.
시간이 조금 지나 1990년대 무렵 다시금 일본 내에서 시티 팝이 급부상하면서 슈가 베이브의 중요도가 수면 위로 떠올랐다.
밴드활동이 종료된 지 거진 20년만에 새롭게 인정받는 분위기가 형성됐는데 90년대 무렵 일본에서 쏟아졌던 시부야 케이에 영향을 주면서도 알려졌다. 이 무렵부터 슈가 베이브는 일본 음악사에 있어서 중요한 위치를 점하게 된다.
특히 ‘Show’나 밴드 최고의 히트곡 ‘Down Town’의 경우 일본의 여러 방송 시그널로 활용되면서 익숙해졌다.
‘Show’의 경우 각 악기의 심플한 리듬 패턴을 쌓아 올려내면서 복합적인 그루브를 만들어냈고, ‘Down Town’은 악기의 어레인지와 멜로디, 그리고 분위기적 측면에서 미래의 시티 팝 사운드에 대한 어떤 표준을 세웠다 말할 수 있었다.
비치 보이즈의 <Pet Sounds>와 BJ 토마스 등의 서던 컨트리 팝 스타일을 결합시킨 ‘비는 손바닥에 가득’의 경우 야마시타 타츠로의 올 타임 베스트 앨범에 ‘Down Town’과 함께 수록되기도 했던 만큼 애착을 가진 곡이었다.
오오누키 타에코가 작곡한 곡들은 신선하면서도 향수를 불러일으켰고 무엇보다 캐롤 킹의 영향이 강하게 감지됐다.
현실세계에서 벗어나 자유로워지고 싶은 열망을 그린 친숙한 멜로디의 ‘신기루의 도시’, 오오누키 타에코의 솔로 활동에서도 불렸던 ‘언제나처럼’, 그리고 애니메이션 <감바의 모험>에도 삽입됐던 ‘바람의 세계’ 등에서 오오누키 타에코의 진면목을 확인할 수 있었다.
슈가 베이브 해체 이후 야마시타 타츠로, 오오타키 에이이치와 나이아가라 트라이앵글을 발표하기도 했던 이토 긴지가 작사한 ‘60년대 꿈이 지나간 날들’의 경우 이토 긴지 스스로가 자신의 걸작이라 언급하기도 했다.
그 밖에도 낸시 시나트라의 ‘Sugar Town’의 일부가 사용되기도 한 마지막 곡 ‘Sugar’를 비롯 앨범에 수록된 모든 곡이 뛰어나기 때문에 이는 일종의 베스트 앨범처럼 들릴 지경이었다.
슈가 베이브는 서해안 팝, 남부 컨트리 록, 훵크 등을 탐구하며 다양한 요소들을 추가해 냈음에도 어떤 통일된 사운드를 유지해갔다. 그러니까 <Songs>는 아메리칸 팝스를 일본의 스타일로 전개하려는 분위기 속에서 태어난 앨범이었다.
청량감 넘치는 보컬과 섬세한 어레인지는 기적과도 같은 마법을 만들어냈고 이는 일본 대중음악의 역사를 논할 때 빠질 수 없는 작품이 된다. 참고로 앨범 커버에 있는 삽화는 니코 제시와 앙드레 모루와가 출판한 사진집 <Women of Paris>에 있는 두 여성을 그린 것이다.
초여름에 어울리는 상쾌한 바람 같은 신선함이 내내 가득한 앨범이다. 슈가 베이브의 분위기는 소소했고 활동은 짧았지만 그럼에도 어떤 혁명적인 성과를 거둬냈다. 밴드에게도, 그리고 일본의 음악 역사에 있어서도 유일무이한 작품인 <Songs>는 50년 가까이 지났음에도 여전히 새롭게 들린다.
내 경우에는 2007년 무렵 일본 밴드 램프의 소메야 타이요와 밥을 먹다가 이 앨범을 꼭 들어보라면서 펜으로 적어줘서 구입했고 여전히 듣고 있다. 다른 일본 친구를 통해 앨범을 받았는데, 앨범 옆 OBI(띠지)에는 이런 문구가 적혀 있었다.
“결정!! 뉴 뮤직으로 가는 길, 모든 음악이 가야 할 길이 여기 있다. 슈가 베이브의 데뷔 앨범”
☞ 추천 음반
◆ Songs (1975 / Niagara, Elec)
본문에서 언급했듯 이들의 정규 앨범은 단 한장이다. 1986년에 첫 CD화가 이뤄졌고 1994년에 데모를 포함한 재발매가, 2005년도에는 오오타키 에이이치가 리마스터한 30주년 앨범이, 그리고 2015년에도 40주년 앨범이 각각 발매됐다.
매회 보너스 트랙과 마스터링 방식이 다르기 때문에 이 앨범을 정말로 좋아한다면 비교 감상하는 것도 추천할 만하다.
◆ 한상철 밴드 ‘불싸조’ 기타리스트
다수의 일간지 및 월간지, 인터넷 포털에 음악 및 영화 관련 글들을 기고하고 있다. 파스텔 뮤직에서 해외 업무를 담당했으며, 해외 라이센스 음반 해설지들을 작성해왔다. TBS eFM의 < On the Pulse > 음악 작가, 그리고 SBS 파워 FM <정선희의 오늘 같은 밤> 고정 게스트로 출연하기도 했다. 록밴드 ‘불싸조’에서 기타를 연주한다. samsicke@hanmail.net